특별함을 느끼다
사뿐사뿐 걸어가 | Theme : 시간은 소중해
짙푸른 해안을 따라
시간을 달리는 기차
강릉 정동진시간박물관
2022년에 접어든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을 넘겼다. 말갛게 솟아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야심차게 세운 계획이 슬슬 허물어지기 쉬운 시기다. 자신과의 약속이 작심삼일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왠지 서글퍼질 땐, 강릉 정동진시간박물관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우리가 찰나라고 여겨왔던 단 1초가 지닌 의미를 음미하고, 400여 점에 이르는 시계를 둘러보면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다. 명확히 칸을 나눠놓은 달력과 달리 정작 시간엔 정해진 경계가 없으니, 삶에서 소중한 가치를 찾을 기회는 충분하다.
글 오민영 – 사진 안지섭
동해안 무지갯빛 열차를 타고 떠나는 특별한
여행
방영 후 거의 30여 년이 지났지만, 정동진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 윤혜린(고현정)이
그림처럼 서 있던 풍경 그대로다. 3번 승강장에
자리한 일명 ‘모래시계 소나무’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일 테다. 지금은 서울과 동해안을 단 2시간 안에
주파하는 KTX가 오가는 이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짙푸른 바다를 마주한 채 멈춘 무지갯빛 열차가 있다.
바로, 지난 2013년 1월에 문을 연
정동진시간박물관이다.
총 길이는 180m로, 전체 7량에 달하는 객차는 시간을
주제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영역을 다룬다. 가장
선두에 선 증기기관차를 지나 선연한 붉은색의 2량에
탑승해 티켓을 끊으면 본격적인 여정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뮤지움 숍(Museum Shop)을 지나 제일 먼저 만나는 3량
‘시간이야기’에선 인류가 시간을 인지하고 측정해온
이유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오롯이 규칙적으로 운동해왔으며,
각고의 연구 끝에 1967년부터 세슘 원자가 91억
9,263만 1,770회 진동하는 단위를 1초라고
정의했다.
4량 ‘시간과 과학’은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
시도했던 갖가지 방법을 총망라한다. B.C. 4000년 경
최초로 등장한 해시계는 지구 자전에 따른 그림자의
이동으로 때를 구분할 수 있었지만, 흐린 날씨나 밤엔
무용지물이었다. 따라서 이집트에선 물시계를 발명해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양에 맞춰 확인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조선 시대 자격루 역시 같은 맥락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부피가 커서 실내에 두기가
어려웠던 탓에 B.C. 1000년을 기점으로 한결 작고
가벼운 연소시계가 주목받았다. 물질이 타들어 가는
속도를 활용한 원리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과거시험 장면에서 등장한 향 시계는 추 3개를 매단
향에 불을 붙여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를 자명종
삼았다. 아울러 유리공예 발달에 따라 나타난
모래시계(4세기), 중량을 이용한 분동시계(14세기),
과학자 갈릴레이가 선보인 진자시계(17세기), 항해에
쓰이는 크로노미터(18세기), 압전효과의
수정시계(19세기) 등을 거쳐 비로소 가장 정밀한
원자시계에 도달했다. 참고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기증한 세슘원자시계는 3만
년에 1초 오차를 내며 전 세계 통틀어 50개뿐이다.
부와 권력, 추억, 예술 등과 함께해온 시계가
전하는 가치
아인슈타인 박사가 상대성 이론을 응용해 속도와
중력이 시간에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면서 수치는 더욱
정확해졌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계란,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섬세하게 잘 만든 작품은 곧
부의 상징으로 통하는 까닭이다. 특히 5량 ‘시간과
예술’이 소개하는 갖가지 명작은 눈 호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게가 70kg인 스터닝 대형 프랑스
고딕 시계, 초바늘을 갖춘 중국 국보급 시계,
12간지와 24절기를 새긴 천문 시계 등엔 중세시대
왕과 귀족의 손길이 어려 있다.
6량 ‘시간과 추억’엔 영화로 익히 알려진 타이타닉
호의 공식적인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회중시계가
반긴다. 침몰 시각인 1912년 4월 15일 새벽 2시
20분에 바늘이 멈춰진 이 시계는 펜실베니아로
돌아가는 딸, 노라의 행운을 염원하며 어머니가 준
선물이라고 전한다.
한편 ‘시간과 열정’을 느껴보는 7량은 다채로운 현대
작가를 접하는 장이다. 미국 수학자 래리 프랜슨이
고안한 세계 최대 자전거 시계, ‘서스펜디드 타임’은
4.6m 면적을 차지한다. 또, 목공예가 제랄드 존슨이
일일이 나무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그랜드우드기어
클락’ 3점이 나란히 전시해 있다. 더불어 동작 조형물
작가인 조지 로드의 ‘쿠키네틱 클락’, ‘시지푸스
타워’ 등이 움직이는 방식에 빠져들면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관점에 따라 ‘우울한 시계’ 혹은 ‘활기찬 시계’로
보인다는 ‘그랜드파더 세븐맨 클락’은 고든 브라듯
작가가 1990년 세계 시계명장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7개 동작 인형이 일상과
성공, 실패 등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삶의 여유를 되찾는 순간, 행복은 내 안에
어느덧 마지막 칸이다. ‘함께한 시간, 함께할 시간’을
테마로 꾸민 객차에선 “커피 한 잔 마시기에 부족하고
노래 한 곡조차 다 못 듣는 1분이지만, 누군가 안아
주기엔 알맞다”고 이야기한 최영순 작가의 그림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 주위로 소원이나 희망을
적은 쪽지가 마치 알록달록한 모자이크인 양 벽을
가득 채운다.
지나온 길을 돌아,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상쾌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공원엔 1999년 강릉시가 세운
밀레니엄 모래시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안에 든
모래가 전부 떨어지면 1년이 지난 셈이기에 해마다
1월 1일이면 거꾸로 돌려줘야 한단다. 그런가 하면,
2003년 설치한 세계 최대 규모 해시계를 통해 햇살에
따라 시간을 가늠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화살촉이
북극성을 가리키며 지면과의 각도가 정동진 위도인
37.6877도에 맞춰져 있다고 하니 제법 신기하다.
역과 박물관 사이를 레일바이크가 부지런히 왕복하는
궤도를 지나 해변으로 향한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는 진리를 떠올리며 오히려 조바심을
내려놓고 여유를 되찾는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활짝 기지개를 켠다. 힘이 난다. 오늘부터,
또 다른 시작이다.
“커피 한 잔 마시기에
부족하고 노래 한 곡조차
다 못 듣는 1분이지만,
누군가 안아 주기엔 알맞다”고
이야기한 최영순 작가의 그림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정동진시간박물관
- 위치 : 강원 강릉시 강동면 헌화로 990-1
- 이용 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동계 입장 마감 시간은 오후 5시)
- 입장료 : 일반 7,000원 / 중고생 5,000원 /어린이 4,000원 / 경로·장애인·국가유공자 3,500원
- 연착처 : 033-645-4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