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이 만들어낸
문화·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모차르트·베토벤·하이든·슈베르트의 본거지. 클림트·에곤 쉴레 등이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 프로이트와 20세기를 뒤흔든 히틀러·트로츠키·스탈린·티토가 같은 시기 머물렀던 장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대한 설명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645년간 이곳에서 유럽을 통치한 덕분에 예술가와 명사들이 모여들었고, 인류 역사에 남을 유산들을 남겼다.

___성수영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평범한 도시, 유럽의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만 해도 빈은 유럽의 흔한 도시 중 하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빈을 수도로 삼은 1440년부터 이 도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645년간) 지배한 유럽 최고의 가문이다. 1273년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고, 이 가문의 후계자들은 정략결혼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주도면밀한 ‘결혼 전략’과 끈기, 다른 가문의 후계자들이 연달아 급사하는 행운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를 5세(1506~1555) 대에 이르러 유럽의 절반을 손에 넣는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언어·지역·민족을 하나로 묶은 건 ‘문화’
여러 민족과 나라를 한번에 다스리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 ‘문화 통치’ 전략을 썼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부흥시킨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는 목판화와 초상화 등을 국정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대중은 환호와 지지로 보답했다. 그 중심이 빈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손들은 학자와 예술가를 적극 후원하고 빈으로 전 유럽의 예술품을 끌어들였다. 음악가들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공을 들여 후원한 대상이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빈의 궁정에 불려와 곡을 지었다. 합스부르크의 문화 정책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군주는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다. 그녀는 1776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전역에서 수집한 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라고 명령했다. 문화를 통해 가문의 위용을 과시하고 제국을 하나로 묶겠다는 의도에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박물관인 빈미술사박물관의 역사도 이때 시작됐다.

(왼쪽) 합스부르크왕가의 시작 막시밀리안 1세
(오른쪽) 마리아 테레지아

빈미술사박물관 전경

여러 문화 뒤섞인 ‘용광로’
빈은 군사적 요충지이자 인접한 이슬람 국가들에서 기독교 세계를 지키는 최전방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빈은 적대 세력의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되었지만, 이 때문에 빈의 문화는 더욱 깊고 풍부해질 수 있었다. 168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빈을 포위했다가 퇴각하면서 커피콩 자루를 여럿 남기고 간 것이 단적인 예다. 이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커피가 유행하는 계기가 됐다. 빈에는 지금의 커피숍인 ‘커피 하우스’들이 여럿 생겨났다. 이는 오스트리아를 유럽 지성의 중심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1808년 나폴레옹에게 빈이 점령당하는 ‘굴욕’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이 점차 저물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빈의 문화에는 좋은 자양분이 됐다. 빈 구도심을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는 무너진 성벽 위에 도시를 원형으로 감싸는 도로 ‘링 슈트라세’를 건설하라는 명을 내렸다. 지금 빈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건물이 이때 함께 완공됐다.

제국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민족주의 물결이 일어나자 독일과 이탈리아 등 제국의 영토였던 나라들이 "우리 민족의 국가를 만들겠다”며 반기를 들었다. 프란츠 1세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국가들을 한데 묶어두려 애썼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빈이었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온 다양한 사상가들이 빈에 집결했고, 이들은 서로 만나 자유롭게 사상과 학문을 발전시켰다. 기울어가던 제국은 1914년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면서 패망의 길을 걷는다. 한 달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오스트리아는 참패하면서 제국 영토의 80%를 잃었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에서도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 참전해 패배한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권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빈은 매일 수많은 음악회, 오페라, 연극, 전시회, 문학 토론 행사가 가득하다. 이는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면모 덕분일 것이다.